心遠室記 (심원실기)
文孝公 敬齋 선생의 6세손 南溪 河公의 휘는 應乾이니 성품이 맑고 곧았고 學文이 뛰어나 일찍 벼슬길에 올라 順天 현감을 하였으나 光海朝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東으로 돌아와 진주 魯川에 은거하였으니 晋州는 公의 관향고향이다.
자손들을 詩禮로 가르치고 사람을 대하여는 桑麻(농사 짓는법)를 가르치셨으며 다시 벼슬에 나감을 계획하지 않으셨다.
일찍 詩 한수를 지어 왈 “머리 들고 보니 서울이 어느 곳인가 南川의 따스한 물은 유유히 흘러가네 옛적에 썩은 쥐 같은 무리들과 경쟁함이 부끄럽고 이제야 한가히 백구와 함께 하면서 깨달았네”하였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아쉬워 公의 유적을 생각하여 慕溪齋를 세우고 그 방을 心遠室이라 이름하여 나한테 와서 記文을 구하였다.
내 생각하니 公이 名利(명성과 이득)에 담담하고 그 出하고 處함이 정당하여 한결같이 彭澤 陶淵明의 유풍을 들음이 있는 듯 하고 心遠 두 글자는 이에 도연명의 詩 중의 말을 인용한 것이니 공의 그 때의 心事를 깊이 알지 못하면 어찌 能히 이러함이 있으리오!
公이 이 같이 뛰어난 행적을 세웠으나 數 百年이 되도록 쓸쓸하게 알려지지 못함이 비록 가히 恨스러운 것 같으나 후세의 子雲과 堯夫(子雲은 揚雄의 자이며 堯夫는 邵康節소강절선생의 자이니 두 분 다 유명한 儒學者이다)가 타인에 있지 않고 그 후손에 있으니 어찌 또한 귀한 일이 아니리오.
禮記에 이르기를 祖先의 美行있음을 알지 못하면 밝지 못함이라 하였으니 河氏제위들은 그 밝고 어질게 행하겠다는 故로 함께 써서 돌려보낸다.
나한테 기문을 請한자는 河 相穆이며 앞뒤로 일을 주선하여 성취한자는 그의 족제 相大,相周와 족질 判奎였다.
병신년 유월 재령인 이현덕 씀
❀ 심원실기는 모계재 현판에 원본이 있으며 모계재창건실록지의 번역본을 이기하였으니 종인 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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