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양양군 서면)지방과 영서(홍천 내면)지방을 오가던 옛길을 찾아 산행 겸 문화 탐방의 기회를 제공한 창원 산우회 회원 여러분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이번 기회가 나에겐 매우 유익하고 즐거운 문화탐방의 시간이었다.구룡령 옛길은 우리 민족의 물자교류와 고된 삶의 애환이 깃던 곳이라고 여겨진다. 영동고속도로의 속사 I.C에서 내려 이승복 기념관을 거쳐 31번도로 타고 꼬불꼬불한 운두령(1089미터)을 넘어면 홍천군 내면이다. 계속 내린천을 따라 56번 도로를 이용하여 내려가면 홍천군 내면 광원리 샘골의 오대산 내고향이란 민박집 및 음식이 있다.여기서 우리 일행은 미리 예약한 점심을 먹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 56번 도로를 따라 ‘백두대간구룡령’ 이라는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하차하여 산행을 시작했다.
백두대간을 알리는 구룡령 이정표
등산채비를 갖추는 동안 기념사진
우리 일행이 내린 지점(구룡령생태터널)
‘백두대간구룡령’이라고 적힌 이정표가 있는 도로에서 산행은 시작됨
사진 촬영을 꺼리는 산행대장의 지인이 일행에게 설명하는 장면
고개마루에서 20여 미터 위 백두대간 길에서 허욱,정효종,그리고 나.
명개리는 강원도 홍천군 남면 방향이고, 양양은 강원도 양양군 서면 방향임
홍천쪽의 옛길과 양양쪽의 옛길 고개마루 (이곳이 옛길의 고갯길의 정상지점).
구룡령 옛길
묘반쟁이 묘
하산 후 시냇물에 발을 담구어 피로를 푼 대원 모습
갈천산촌 체험학교 교문
우리의 숙소인 갈천초등학교 분교 모습
갈천체험학교 정문 앞에서
우리 일행의 식사 모습. 벽에는 맛있는 음식점이라고 표현한 글귀들이 많이 붙어있다.
산채나물이 맛있어 더 달라고 한 ‘오대산내고향’ 음식점
이 구룡령옛길은 속초, 양양 사람들은 가파른 한계령 미시령을 못 넘고 주로 구룡령을 통해 홍천, 평창, 서울로 다녔다고한다.
옛길 가는데 그 원형이 수백년 전의 모습으로 가장 잘 보존 된 길이다. 통일신라의 최치원이 이 길을 넘었고 의상대사가 이 길을 넘나들었다고 한다.
지리에 밝거나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도 구룡령 옛길을 모른다. 모두가 현 56번 국도가 구룡령 옛길인 줄 알고 있으나 사실 구룡령 옛길 아흔아홉 굽이가 실제 구룡령 길이다. 구룡령 옛길에는 조상들이 어떻게 길을 다녔는지를 보여주는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요즘 백두대간을 넘어 보면 험한 지형이 실감난다. 그래서 이 급경사의 산지에서 말이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상상하기 힘들다. 구룡령 길은 여러번 굽이를 주어서 발품을 더 팔더라도 힘겨움이 덜 하도록 자연스럽게 형성해 놓아 옛선조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숲과의 조화도 너무나 잘 어울려 똑같은 고도의 등산로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여유가 길에 묻어 있다. 숲의 원형이 훼손되지 않으면서 다니기에 편안한 길이 바로 이 길인 것이다. 구룡령 길이야 말로 봄이면 형형색색 꽃이 피고 여름에는 울창한 숲이 하늘을 덮고 가을이면 수십종류의 단풍이 우리를 반겨주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이란 것을 느낀다.
구룡령 옛길에는 굽이굽이 백성의 꿈과 희망 그리고 아픔과 좌절이 녹아 있다. 일제 때 철을 캐갔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철광굴과 삭도가 녹슨 모습이 예전을 떠올리게 한다. 농경사회의 시작과 철기문화가 시작되면서 양양 일원에 공급한 철기문화가 열렸고 농기구의 원재료를 구룡령 옛길 한쪽에서 생산해 낸 것이다. 일제강제 수탈의 현장이 있었던 점도 흔적을 통해 확인됐다.
숲으로 펼쳐진 구룡령 옛길의 또 다른 명물은 금강소나무이다. 1980년대 경복궁을 복원할 때 이곳에서 통나무를 가져갔고 베어진 소나무 자국이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도 남아 있는 200~300년된 금강소나무가 붉은 기운을 띠고 하늘을 찌를듯이 뒤덮고 있어 여행자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래서 솔반쟁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군 경계를 위해 몸을 바쳤던 청년때문에 묘반쟁이가 있으며 장례식 때 쓰던 횟가루를 캐갔던 횟돌반쟁이 등의 자국이 그대로 있다. 40여종의 잡목은 하늘을 덮고 수백년 된 나무들이 풍설에 못이겨 버티는 모습이 정말 삶의 고뇌를 연상케 한다. 하산하면 갈천천이 반갑게 맞으며 이런 청청 개울도 아직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