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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과 사직대제

     사직이란 사(社)는 토지를 다스리는 신이요,직(稷)은 곡식을 다스리는 신을 뜻하며 합하여 사직(社稷)이라 부른다.

     「사직대제(社稷大祭)」는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오곡을 주관하는 직신(稷神)에게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향의식으로 오랫동안 농업을 생활 기반으로 삼았던 우리 민족에게 땅과 곡식은 나라를 지탱하는 근본이었다. 우리나라
      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사직에 대해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였고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거행되었
      다. 「사직대제」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종묘제례(宗
     廟祭禮)」와 함께 중요한 의식이었다. 이후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2년(1908년)에 폐지되었던 사직대제는 지
     난 1988년 원형대로 복원된 이래 해마다 봉행되고 있으며, 2000년 10월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11호로 지  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우주 만물을 제재(制裁)하 는  삼재(三才)인 천(天)․지(地)․인(人)에 대한 국가적 제례로 「환구 제」․「사직제」․「종묘제」가 있었다. 그 중 「사직제」는 궁중제사(宮中祭祀) 중 대사(大祀)에 속하여 「사직대 제」라고 한다.

※ 조선시대 3대 제례

○ 환구제(圜丘祭) : 천자(天子)가 천신(天神)에 대해 드리는 제사이다. 제천의례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시행되고 있었으나 유교적 예제의 하나로 행하여진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조선초에 제천의례가 억제되자 환구제는 폐지되었다가, 고종이 1897년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제천의식이 복원되었다.

○ 사직제(社稷祭) :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오곡을 주관하는 직신(稷神)에게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향의식으로 궁중제사 중 대사에 속하여 사직대제라고도 한다.

○ 종묘제례(宗廟祭禮) :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 제사 가운데 가장규모가 크고 중요하기 때문에 종묘대제라고도 한다. 종묘제례는 19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었다.(2008년 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으로 통합)


                                             사직단(社稷壇)과 사직공원

사직이란 나라에서 백성의 복을 위해 제사하는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의미한다. 임금이 나라를 세우면 먼저 사직과 종묘를 세운다. 임금을 사직의 주인이라 하여 나라가 존재하면 사직의 제사가 행하여지고 망하면 사직의 제사는 폐지된다. 그러므로 사직은 종묘와 더불어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시되었으며, 국가에 대한 별칭으로 종사(宗社)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역사소설이나 방송에서 조선시대 드라마를 볼 때 국가의 존망을 흔히 ‘종묘사직이 평안하다’라든가 ‘종사가 위태롭다’라고 표현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사직단은 사직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단을 쌓고 봉사한다. 사단과 직단의 두 단이 마련되는데, 사단은 동쪽에 있고, 직단은 서쪽에 있다. 옛날에는 임금이 새로 나라를 세워 백성을 다스리게 되면 먼저 사직단을 만들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어 왔으며, 신라시대에는 선덕왕 4년(783)에 사직단을 세웠고, 조선시대에는 태조 4년(1395)1월에 사직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의 위치는 중국 주나라의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을 원용하여 종묘는 북악산과 경복궁을 기준으로 왼쪽인 지금의 훈정동에, 사직은 오른쪽으로 지금의 사직동에 설치하였고, 현재는 종로구 사직동 1번지 28호 사직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사직단의 관리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으로 사직서(社稷署)가 있으며, 조선 태조 3년(1394)에 설치하여 27대 순종 2년(1908)에 폐지하였다. 사직서에서 숙직하는 관원은 매 5일마다 사직단을 살피고, 음력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신위(神位)를 모신 방인 신실(神室)을 살핀 후 고치거나 개선할 일이 있으면 예조(禮曹)에 보고하였다. 조선시대 사직단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의 주요 도시에도 설치되었는데 서울의 것이 가장 규모가 컸다. 서울과 지방에서 왕과 지방 수령이 사직단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렸는데 이는 당시 농업이 산업의 중심이었던 전통사회에서 토지와 곡식의 중요성을 그 무엇보다 상위의 개념으로여겼기 때문이다. 국가의 안위를 한 몸에 맡은 중신을 흔히 사직지신(社稷之臣)이라 하였다. 세조는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를 종종 ‘사직지신’이라고 추켜 세웠다.

사직공원을 가보면 처음 접하는 것이 사직단 정문이다. 보물 제 17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원래 1395년(태조 4)에 처음 만들어졌지만 지금 있는 건물은 18세기 말에 중건된 것이다. 정문은 사직단과 관련된 여러 시설물로 들어가는 입구이며, 본래 신이 드나드는 방위로 여겨지는 북쪽에 있었지만, 18세기 후반 태풍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문을 지금의 동쪽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62년 사직단 앞을 가로지르는 사직로를 새로 만들면서 정문은 다시 14m 뒤로 물러나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는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다. 정문 우측 통로로 들어가면 바로 사직서터 표석과 공원 조감도가 있는데 조감도 뒤편 숲에 안향청(安香廳)이 있다. 조선 후기 숙종 때 만들어진 시설로 신실(神室)을 수리하고자 할 때에는 신위를 일시 이곳에 옮겨 모시기도 하였다. 현재 이 건물은 공원관리사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정문 바로 뒤로 낮은 두겹의 담장이 있고 그 안에 사직단이 있다. 현재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상태이다. 담장의 동서남북 네 곳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는데 홍살문 앞에서 보면 1미터 높이로 쌓아진 직사각형의 두 개의 단이 동서로 자리잡고 있다. 두 단의 모양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에 따라 한 변이 7.65m인 정사각형이다.

신위는 모두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모셨는데 사신 옆에는 후토신(后土神), 직신 옆에는 후직신(后稷神)을 배향하고 매년 정월, 2월, 8월 세 차례씩 제사를 지냈으며 가뭄이 들어도 기우제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종묘와 사직의 신위를 모시고 개성으로 옮겼다가 황해도 해주에 임시 봉안하였고, 정유재란 때에는 황해도 수안으로 옮겼는데 사직서와 신실, 부속건물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사직제사는 1909년 3월에 사직 전사(典祀)를 임명한 이후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인 1922년 10월 경성부는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사직단 일원을 공원으로 조성하고, 1932년에는 북쪽의 500평을 매동초등학교에 분할하였다.

사직공원 안에는 사직단과 신사임당 동상, 이율곡 동상, 단군성전이 있다. 과거에는 사직공원 안에 수영장도 있어서 여름이면 이곳에 가서 더위를 식힌 기억도 있다. 물론 지금은 없어져 추억거리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지만 사직단과 현재의 시설물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몰라도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대표하는 중요한 문화유적이 제대로 대접받고 있는지는 궁금할 따름이다.

글∥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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