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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여사촌

hadosub 2009. 9. 17. 20:56

여사촌(남사들)은 진주에서 서쪽으로 40리 되는 곳에 있으니 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인데 옛날에는 진양 땅이었다. 지리산 동쪽 단구(丹丘)의 지역 이구산(이丘山)밑이요, 단속(斷俗)의 물이 앞뒤로 보호하듯 둘러 있고 신안강(新安江:鏡湖)하류가 동남쪽을 지나가는 곳이다. 이곳에서 사직공의 6대손인 판서공(判書公) 휘 보(保)께서 탄생(서기 1220년대로 추정)하고, 손자인 원정공(元正公) 휘 즙(楫)이 고택에서 1303년에 탄생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판서공 이전부터 여사촌에 세거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처음 어느 때부터 터를 잡고 살았는지는 상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는 여사촌 뒷산 이구산의 산 이름은, 하씨의 전성기에 종인(宗人)모두가 예의범절이 훌륭하여 중국 노나라 공자가 살던 이구산 밑의 궐리(闕里) 사람들의 예의범절과 같았던 로로 뒷산을 이구라 이름하였고, 동네 어귀 개울까에 쌍태석(雙台石)이 있는데 풍수지리학자가 이르되 "하씨가 귀현(貴顯)하는 것은 이 쌍태석 때문이다."고 하매 아전(衙前)의 무리가 받드는 일이 고되므로 가만히 꾀하여 무너뜨리니 이로부터 하씨가 여사촌에서 거주함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한다.

  원정공이 송학에 거주하였음과 고헌공(苦軒公)이 개경과 양정에 거주하였음은 모두 당시에 잠시였고 여사촌의 옛집은 그대로 있었다. 원정공이 이곳에서 돌아가시고 문효공의 다섯 형제와 네 분의 종형제가 모두 이곳에서 탄생하였다. 통정공 강회백(通亭公 姜淮伯)의 행장(行狀)에 문효공이 젊었을 때 진곡(晉曲)에 집을 지었다 하였는데 역시 여사촌의 옛터를 가르킨 것 같다.

  목옹공(木翁公) 휘 자종(自宗)께서 서울로 이사하여 살 게 됨에 여사촌의 옛집이 외손 강씨(姜氏)에게 속하게 되었고 여러 대를 내려와 다른 사람에게 전매되었는데 인조 때 후손 태계공 진께서 되돌려 받았으며 지금은 태계공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집 뜰에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원정공이 손수 심었다고 하며, 또 감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문효공이 손수 심었다고 전하는데 아직도 매화나무에는 꽃이 피고 감나무에는 감이 열린다. 원정구려(元正舊廬)의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이 곳은 지리산 동쪽 줄기가 내려와서 그 영기가 맺힌 곳으로 산자수명할 뿐 아니라 그 절묘한 형국은 언뜻 보아도 범속을 벗어나 빼어 났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한창 번성할 때에 이곳에서 정승판서가 태어났을 뿐 아니라 봉군(封君)이 세 분(晉用, 晉山, 鳳山)이며 시호가 두 분(元正, 文孝)이며 대대로 문과에 급제하여 집안에 옥패금장(玉佩金章)이 즐비했을 뿐 아니라 모두 지기(志氣)가 청고(淸高)하여 한 사람도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없었을 뿐 아니라 모두 충성하고 효도하였으니 참으로 승지라 할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