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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뿌리찾기

담락당 하욱(하립)과 삼의당 김씨의 유적을 둘러보고

2020년 10월 14일 진안마이산 탑사 아래에 있는 담락당(하욱)과 삼의당 두 부부 시인을 기념하는 시비를 구경하였다

담락당은 진양하씨 사직공파 24세손으로 과거시험에 낙방은 했지만 하욱( 河昱)[1769~1830]은 조선 후기 학자로 부인 삼의당(三宜堂) 김씨[1769~1823]의 내조로 두 분은 시인으로 명성이 높은 분이다.

삼의당(三宜堂) 김씨는 1769(영조45) 남원에서 사관 김일손의11대손 김인혁의 딸로 태어났다.본관은 김해.택호가 삼의당이다.여성이기에 택호만 전해진다. 조선시대 여성으로서 가장 많은 257편이나 되는 시문을 남겼다.천상배필이라 불리었던 이들 부부의 첫날 밤,서로 주고받은 시가 전해내려 온다.

담락당 하립과 삼의당 김씨의 명려각

담락당·삼의당 부부 시비 오른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의 명려각(明麗閣)이 건립되어 있는데 이는 시비의 두 주인공인 담락당과 삼의당을 모신 재각이다. 1984년부터 매년 1013일에 시비 앞에서 진안군 관내 초··고등학생이 참가하는 마이 백일장이 열린다.

담락당과 삼의당은 마이산 기슭 마령면에서 200년 전 살았던 부부 시인이다. 삼의당은 여성의 이름으로 시문집을 출간하여 후대에 전한 희소성만으로도 그 존재 가치가 크다. 나아가 삼의당의 시를 통해 조선 후기 몰락 양반 여성의 일상과 시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삼의당김씨(三宜堂金氏)

1769(영조 45)1823. 조선 후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김해(金海). 당호는 삼의당(三宜堂). 전라도 남원 서봉방(棲鳳坊)에서 태어나 같은해 같은날 출생이며 같은 마을에 살던 담락당(湛樂堂)하립과 혼인하였다.

삼의당과 담락당 부부는 나이도 같거니와 가문이나 글재주가 서로 비슷하여 주위에서 천정배필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중년에 선영(先瑩)을 수호하기 위하여 진안 마령면(馬靈面) 방화리(訪花里)로 이주하여 거기에서 시문을 쓰면서 일생을 마쳤다.

삼의당김씨의 문집에 기록된 것처럼 남편 하립이 그 부인이 거처하는 집의 벽에 글씨와 그림을 가득히 붙이고 뜰에는 꽃을 심어 삼의당이라 불렸다 한다. 그의 평생소원은 남편이 등과하는 것이어서 산사에서 독서하고, 서울로 관광하는 일을 철저히 권장하였다.

가세가 궁핍하였기 때문에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머리털을 자르기도 하고 비녀를 팔기까지 하였으나 남편은 결국 등과하지 못하였다. 그는 평생을 두고 남편에게 권학하는 글을 많이 썼으며, 가장 규범적이요 교훈이 되는 글을 많이 썼다.

죽은 해는 알 수 없으나 620일에 죽었다고 하며, 묘는 진안 백운면 덕현리에 그 남편과 함께 쌍봉장으로 하였다. 진안 마이산(馬耳山) 탑영지(塔影池)에는 시비 담락당하립삼의당김씨부부시비가 세워졌다.

문집으로는 삼의당고2권이 1933년에 간행되었는데, 여기에는 시 99편과 19편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전북 남원시 산곡동에 있는 교룡산성에 김삼의당시비’(金三宜堂詩碑)가 세워졌고, 진안군 마이산 탑영지(塔影池)담락당하립삼의당김씨부부시비’(湛樂堂河砬三宜堂金氏夫婦詩碑)가 있다.

창밖엔 날이 길고 향기로운 바람 부는데

석류화 어찌하여 하나씩 붉게 필까

와석(瓦石)을 던지지 말게, 꾀꼬리 놀라겠네

日長窓外有薰風 安石榴花個個紅

일장창외유훈풍 안석류화개개홍

莫向門前投瓦石 黃鳥只在綠陰中

막향문전투와석 황조지재녹음중

지금 녹음 속에는 꾀꼬리가 있다오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삼의당 김씨(三宜堂 金氏`1769~1823)로 뛰어났고 여류시인이다. 탁영 김일손의 후손인 김인혁의 딸이며, 담락당 하립(河笠)의 부인이다

담락당 하립과 부인인 삼의당 김씨는 남원에서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가문이나 글재주가 서로 비슷하여 주위에서 천생배필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고 한다.

삼의당은 담락당의 독서와 면학을 권장하였으며, 담락당은 부인 삼의당이 거처하는 집의 벽에 글씨와 그림을 가득 붙이고 뜰에는 꽃을 심어 삼의당이라 부르며 서로를 존중하였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데다가 담락당이 번번이 과거에 낙방하자 부부는 진안으로 이주하여 시문으로 화답하며 살았다. 이들은 조선 시대에 실로 서로를 존중하며, 시로 사랑을 나눈 부부라고 할 수 있다.

김삼의당(金三宜堂, 1769-1823)은 전라도 남원의 서봉방(棲鳳坊)에서 태어났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2-1498)의 후손인 김인혁(金仁赫)의 딸이며, 담락당(湛樂堂) 하립(河笠)의 부인이다. 삼의당은 어려서부터 재예에 뛰어나 여공의 틈틈이 책을 놓는 일이 없어 일찍이 중국의 시문집을 비롯하여 경서며 사기류를 널리 섭렵하였다. 삼의당과 하립은 남원 출신인데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한다. 두 사람의 집안은 존경받는 학자 집안이었으나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데다가, 하립이 번번이 과거에 낙방하자 서른 살이 넘어서 낙향하였다. 부부는 진안(鎭安)에 땅을 마련하여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책을 읽고 시문을 화답하며 살았다. 삼의당은 평생을 유교적인 규율과 부도(婦道)를 지키며 일생을 마쳤다

천생연분이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말한다. 내가 보기에도 천생연분이란 천에 하나가 있을까 말까 하는 인연, 1/1000의 인연을 말하는 듯하다. 그만큼 천생연분이란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요, 부부간 금슬이 좋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조선후기 여성문인이었던 김삼의당과 하욱 부부를 들 수 있다. 김삼의당은 조선후기 여성문인으로서는 가장 많은 시 작품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열여덟 새 신랑 열여덟 새 신부

동방화촉 밝히니 좋고도 좋은 인연

같은 해와 달에 태어나고 살기도 같은 동네

이 밤의 우리 만남 어찌 우연이리

 

부부의 만남에서 백성이 생겨나고

군자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하오

공경하고 순종함이 아내의 도리

몸이 다하도록 낭군의 뜻 어기지 말기를

그러자 삼의당도 하욱과 마찬가지로 연달아 시 2수를 읊어 하늘이 정해준 인연을 만난 걸 좋아하면서도 앞으로 남편 노릇을 잘하라고 당부한다.

우리 둘이 만났으니 광한루 신선

이 밤의 만남은 옛 인연을 이음이라

배필은 본디 하늘의 정함이니

세상의 중매란 다 부질없네

 

부부의 도리는 인륜의 시작이니

온갖 복이 여기에서 비롯된다오

시경의 <도요편>을 다시금 살펴보니

온 집안의 화목함이 당신 손에 달렸소.

정창권 고려대 초빙교수님의 글과 프리미엄조선기사 에서 참고,인용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