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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및 역사.문화 탐방

덕수궁 탐방

2012년 9월 26일 부모님 제사를 모시고 귀가하는 도중에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덕수궁을  둘러보았다.

덕수궁은 1593년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피신을 갔다가 돌아온 후 거처하면서 처음 궁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이후 광해군의 시대 ‘경운궁’이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인목대비가 이 곳에 유폐되었으며, 인조가 이 곳에서 즉위한 바 있다. 오랫동안 궁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가 고종이 아관파천(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일본군에 의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있던 고종이 왕세자와 함께 1896년 2월 11일부터 약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거처한 사건)후 1897년 경운궁으로 환어하고 같은 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궁’으로 새롭게 거듭났다. 그러나, 독립국의 위용을 드높이고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아이디어를 실현하고자 했던 고종의 ‘경운궁 프로젝트’는 일제에 의해 강력하게 저지당했다. 고종은 황제의 자리를 강제 양위한 후, 1919년 덕수궁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음.

 원래는 대안문인데 1904년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재건후 이 때 이름을 대한문으로 바뀜.

 함녕전 전경(보물 820호)--고종의 침전-1904년화재로 복원된 건물

 현장학습을 나온 어린이들

 

 

 고종의 침실

바로 앞 건물이 덕홍전임.그리고 높은 축대위의 큰 건물이 중화전임.

 덕수궁의 편전.고위관리나 외교사절을 접견하던곳

 

 크롬도장을한 의자라고 합니다. 덕홍전 프로젝트 하지훈 작품이라 생각됨

 

앞의 건물이 덕홍전이며 어린이들이 있는 건물이 함녕전임

중화전의 대문 앞에서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에서

 

 중화전 입구의 석조조각품

 중화전의 옥좌

중화전 모습

 

 

 

 

석어당은 1593년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피신을 갔다가 서울로 돌아와 이곳에 머물면서 궁의 역사가 사작됨.선조가 승하 하고 임목대비가 약5년간 유폐되기도 한 곳

석어당 문루에 전시되어 있는 덕혜옹주 사진이 보임. 고종시대 덕혜옹주를 위한 유치원이 즉조당 일곽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즉조당일원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던 곳으로 덕수궁(옛 경운궁)의 모태가 된 곳이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어한 뒤 1902년 중화전을 건립하기 전까지 정전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1904년 화재로 즉조당이 소실되자 고종은 이를 매우 안타까워 했다. 인조 즉위 이후 서까래하나 바꾸지 않고 소중하게 보존해 왔던 까닭이다. 현재 즉조당에는 1904년 대화재 이후 중건된 건물로 고종이 손수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뒷편의 목조2층 건물이 석어당

고종이 업무를 보던 편전. 1904년 화재후 복원됨

<고종황제가 차를 마시며 연회를 즐겼던 정관헌>

1900년 대한제국 시절 고종이 다과를 들거나 연회를 열고 음악을 감상하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덕수궁 안에 지은 회랑 건축물이다. 궁 내의 근대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으며, 정면과 좌·우측 발코니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고, 회색과 붉은색 벽돌로 벽면이 다양하게 장식되어 있는 등 화려하고 이색적인 모습이다.

 

 내년 2013년 10월 22일까지 보수공사가 진행될 석조전 모습

 

석조전앞의 분수대에서(뒷편이 중화전임)

덕수궁 미술관

 석조전앞의 분수대 쉼터

<덕수궁 프로젝트>는 다양한 시간의 층위를 가진 채 파란만장한 사건의 현장이었던 덕수궁 곳곳에 한국 현대미술가의 작품을 제작 의뢰하여 설치한 것이다. 중화전, 함녕전, 덕홍전, 석어당, 정관헌 등 전각과 정원에서 총 9개의 작업이 이루어졌다. 미술가, 음악가, 무용가,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참여하였고, 조각 작품의 설치 외에도 사운드 아트, 공연, 퍼포먼스 등 여러 종류의 관객참여적 ‘활동’이 수반되었다. 덕수궁의 역사가 지닌 육중한 무게감을 짊어진 채 예술가들은 각자 특유의 상상력과 해석을 더한다.